정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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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EONG KWANGHO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윤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습관과 그리고 이어지는 과보들이다. 생애 밖에서 그 사람의 삶과 죽음을 이어주거나 연계시키는 윤회하는 주체나 영혼, 아트만 같은 것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 같은 원자나 양자 단위의 물질일 뿐이다. 물질들은 주체를 형성하거나 말소시키면서 가로지르는 어두운 바탕 같은 것이다.  

차라리 윤회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나와 너 사이에, 부모와 자식 간에, 우리와 나 사이에, 세계와 세계 내의 현존재인 나 사이에, 더 나아가 어제의 그들과 오늘의 나 사이에 윤회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 부른다.

문화는 이제 집단적인 습관을 이어가면서 윤회의 흥망성쇠와 과보를 그 사회에 부과한다. 정신, 영혼, 성령, 이성, 귀신 등등이 그 영매의 이름표들이다.

문화는 하나의 습관이다. 사람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한 이 집단윤회와 그 과보를 피할 길은 없다. 니체는 모든 종교와 문화에 붙어 다니는 그릇된 영매들을 쫓아내기 위해 나약하지만 인간 자신의 힘에 의지할 것을 천명한 최초의 사람이다. 반복되는 비극이 아니라면 그가 어디서 영원회기를 꿈꿀 수 있었을까?  

예술은 예술에 붙어 다니는 모든 재현적인 영매들에 대항하여 오직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싸우는 하나의 비극의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자신의 것, 자신의 힘이 되는 것은 오로지 물질과 그 물질에 접촉하는 작가의 감각 뿐이다. 거기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로서의 대상은 작가를 감각하고 그 감각을 작가도 감각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마치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관찰자가 존재하면 전자는 입자로,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파동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물질 자체인 색채와 터취로서 감각을 투입 투출하면서 여명의 사과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세잔이었다.

이제 나의 비젼은 작품을 만드는 손의 감각 안에서만 확장될 수 있다. 손으로 감각한 만큼씩만 표면적을 늘려 나가는 것이다. 뱀은 성큼성큼 뛰어다닐 다리가 없다. 뱀은 오로지 자신의 피부로만 감각하면서 대지의 주름을 섭렵한다. 감각에 비하면 지각, 감정, 이성, 정신 따위는 의식의 지평에 사로잡힌 영매 즉 환상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회화 또는 조각의 표면과 피부는 감각이 확장해가는 영역만큼씩 표면적을 늘이면서 휘고 늘어나며 수축하고 접힌다. 표면과 피부를 따라 확장하는 감각에게 거리 같은 것은 없으며 무한이 수렴하는 지평선 같은 것도 없다. 그것은 그저 추상일 따름이다. 펼쳐지거나 수축하는 주름 표면과 그것의 군도들만이 사건의 평면에 불연속적으로 둥둥 떠 있을 뿐이다.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은 빛의 절대적 속력에 상응하는 절편화 된 상대적 변수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공간은 빈 여백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칸트가 지시하는 사물의 배경도 아니며 직관의 형식적 범주도 아니다. 시공간은 시간과 공간의 합성체가 아니라 반대로 사물의 속도와 리듬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우글거리는 어떤 속도와 리듬들만이 그렇게 감도는 우주를 구성한다. 어떤 화급함과 나른함이 때이른 혹은 때늦은 우발점들과 마주친다. 정신은 항상 결과적인 반성만을 할 뿐이다. 정신이 필연을 감내할 수는 있어도 우연을 거느릴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화가의 손은 코드화 된 통사법 내에 머물면서도 외부의 어떤 다른 의미를 지휘하고 있는 부정동사임을 눈치채야 할 때이다.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는 명제는, 환상인가? 아닌가? 환상이기도 하고 실재이기도 한 것인가? 아니면 환상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것인가? 잘 모르겠다면 용수보살에게 물어 보시길.......